광교산은 수원 사람들에게는 친근한 산이다. 수원 시민들에게 흔한 등산코스가 되는 광교산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중요한 전투가 많았던 장소이기도 하다. 오늘은 병자호란에 있었던 광교산 전투에 대해 포스팅해보려 한다.
미디어 속의 광교산 전투

연인이라는 드라마에서, 광교산 전투에 대한 내용을 잠깐 접할 수 있다. 드라마 속에서는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있는 인조를 구출하기 위해서 근왕군이 진군하는 내용이 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근왕군들이 청나라 군대에 속속들이 격파 당하는 가운데, 주인공은 김준룡 장군(실제 인물)의 부대에 합류하여 상대방을 허를 찌르는 방식으로 청나라 군대를 격파 한다.
드라마인 만큼, 주인공의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이지만,실제 역사에서는 김준룡 장군의 활약이 돋보인 전투였다.
광교산 전투의 배경
실제 발생했던 광교산 전투에 대한 내용은 [국립진주박물관]의 영상을 보면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참고로 국립진주박물관은 국내 전쟁사에 대한 흥미로운 영상을 제작하고 있으니 전쟁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영상들을 훑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당시 상황
우리나라는 청나라의 침입을 2회 받았는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그것이다. 정묘호란때 침략한 청나라 군은, 후방 명나라 군의 압박과 조선군의 산성을 기반으로 한 방어 전략으로 큰 수확을 얻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10년 후에 발생한 병자호란에서는 상황이 급변하였다.
청나라는 정묘호란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병자호란에서는 엄청난 기동력을 보여준다. 청나라 군은 기동력을 살려 조선군의 산성을 공략하는 것은 포기한 채, 곧바로 수도인 한양을 향해 진격하였다. 일종의 진격전을 벌인 것이다.
청나라의 기상천외한 속도는 조선군의 방어를 무력하게 만들었고, 침략군은 순식간에 한양에 도달하게 된다. 얼마나 빠른 속도였는지 조선의 조정은 반응할 시간조차 갖지 못했고, 남한산성에 갇히게 되었다.
본디 오랑캐의 침입이 발생하게 되면, 왕들은 강화도로 피난을 가게 된다. 오랑캐들은 유목민족인 만큼 수전에 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나라의 진격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왕이 피난을 가기도 전에 한양 근처에 도착하게 되었고, 인조는 그대로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된 것이다.
근왕군의 이동
남한산성에 갇혀 청나라 군에 포위된 인조는 전국 각지에 왕명을 전해 근왕군을 소집하게 된다. 근왕군이란 왕을 위한 군대이며, 남한산성에 갇혀 있는 인조를 구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전력이 소집되어 남한산성으로 지군하게 된다.
당시 근왕군은 속오군이라고 해서, 일종의 예비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속오군으로 구성된 근왕군은 규모에 비해 훈련 정도와 사기는 매우 낮았다. 또한 진군하면서, 거쳐가는 지역의 지원을 받으며 전투준비 태세를 취해야 하는데, 사태가 급박한 만큼 제대로 전투 준비를 갖추지 못한 모자란 군대가 되었다.
각개격파된 근왕군
전국 8도에서 모집된 근왕군들은 남한산성으로 진격을 시작하였다. 청나라군은 조선의 국경 병력들을 무시하고 침략한 탓에, 이러한 병력의 집결을 무시할 수 없었다. 때문에 청나라 군은 각개격파를 통해, 병력의 집결을 방해하였다.
전국의 근왕군들은 청나라의 기동력에 의해 하나씩 각개격파 당하였는데, 그 중에서 유일하게 승리한 전투가 전라도 근왕군의 광교산 전투였다.
왜 광교산인가?
광교산에는 형제봉이라는, 유명한 봉우리가 있다. 해당 봉우리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면 성남시내는 물론, 인조가 갇혀 있는 남한산성을 볼 수 있다. 즉 전략적으로 매운 요충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광교산 전투를 이끈 장수인 김준룡 장군은, 선발대 2천명을 이끌고 광교산을 점령하라는 명을 받는다. 선발대가 광교산에 도착하자마자 3500명의 청나라의 기동대를 맞닥뜨리게 되고, 그렇게 광교산 전투는 시작하게 된다.
광교산 전투의 승리 이유
당시 대륙의 라이징 스타였던 청나라 군대라 싸워서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 있을까? 이것은 당시 조선군을 이끌었던 지휘관이 화포 사용에 능하고, 여진족을 상대한 경험이 많아서 였다고 볼 수 있다.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
전라병사 김준룡 장군은 전라도에서 수군 장수로 복무한 경험이 있으며, 황해도에서 근무하면서 여진족을 상대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화포를 다루는 것은 물론, 이민족의 전술에 능했다고 한다.
적극적 지휘
명나라군과 싸우며 전쟁 경험이 많은 청나라군과 달리, 조선군은 급하게 끌어모였던 병력인 만큼 오합지졸에 가까웠다. 이러한 조선군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여러 장수들은 병사들과 함께 앞장서서 싸웠다. 지휘관의 진두지휘는 조선군의 사기를 드높이는 역할을 했고, 장수들 또한 직접 전황을 상세히 파악하고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조총의 활용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조총병 육성에 많은 힘을 기울였으며, 조총을 통한 화력의 집중은 광교산 전투에서 승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충분한 탄약 준비 또한 승리의 요인중 하나였다. 통상적으로 조선군은 8~10발의 탄약을 소지하는데 비해, 당시 광교산 전투에 참전한 조총병의 경우 약 50발에 해당하는 탄약을 소지하였고 이를 적극 전투에 활용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탄약을 적극 사용 하다보니, 이를 상식적으로 납득하지 못한 조정에서는 탄약 사용량이 말이 되지 않는다며 이를 문책하기도 했다.
유리한 지형
김준룡 장군의 선발대는 광교산의 유리한 지형을 선점함으로서 전략적으로 우위를 점했다. 산의 특성상 청나라 군대는 좁은 협곡으로 진입할 수 밖에 없었고, 화력에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청나라군은 명나라군을 상대할때 사용하는 대포까지 사용하였으나, 이러한 지형적 이점에서 밀려 고전했다고 한다.
적 지휘관 사살
당시 광교산 전투에 파견된 청나라 지휘관은 [아이신기오로 도도]와 [슈무루 양구리]가 있다. 아이신기오로 도도의 경우 누르하치의 아들로 경험많은 지휘관이었으며, 슈무루 양구리는 청나라의 대표적인 돌격대장 격이었다.
당시 양구리는 산위의 조선군을 후방기습하기 위해 광교산에 오른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김준룡 장군은 화려한 복색에 깃발을 들고 있는 장수를 발견하게 되었고, 조총병들에게 일제 사격을 명한다. 집중 사격으로 청나라의 유명 장수였던 양구리는 전사하게 되고, 그의 장수들 또한 다수 사망하였다.
광교산 전투 이후
조선군은 청나라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물자를 점검하게 된다. 하지만 워낙 화력을 쏟아부은 탓에 절반 이상의 탄약을 소모해버렸고, 한번 더 전투가 벌어지면 버티기 어렵다는 결론에 봉착하게 된다.
원할치 못한 보급
원래대로라면 본대에서 탄약과 물자를 보급해 주어야 했지만, 이러한 물자 보급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번의 전투로 대부분의 물자를 소모한 부대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후퇴를 고려해야만 했다
후퇴
결국 조선군은 근처에 있는 수원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후퇴는 어두운 밤에 이루어졌다. 조선군은 원래의 진지에 병사들이 지키는 것 처럼 횃불을 곳곳에 세워 청나라 군을 속였으며, 조금씩 군사를 빼어 후퇴를 진행했다.
원래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전라도 근왕병들은 청나라 군대가 습격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과 버림받았다는 배신감에 후퇴 도중 다수가 탈영해버린다. 결국 살아남은 근왕군들은 모두 흩어져 버렸고, 남한산성을 향한 전라도 근왕군의 진군은 좌절되고 말았다.
광교산 김준룡 장군 전승비

김준룡 장군은 당시 최강 청나라 군대를 상대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평생 시달렸다고 한다. 김준룡 장군이 만들어낸 승리는 세월이 흘러 많은 이들에게 잊혀졌지만, 드라마를 통해서나마 간접적으로 알려지며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전투가 벌어졌던 광교산에는 이러한 김준룡 장군의 승리를 기념하는 전승비가 있다. 혹여 나중에 광교산을 등산하게 된다면, 잠시 시간을 내어 보고 가는 것도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